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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09일
'철커덩 철컹...'
철륜이 내뱉는 소음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전차 안은 침침한 흰 빛과 지친 얼굴들로 가득했고, 나는 자동문 앞에 서서 유리창 너머의 비오는 야경을 보고 있었다. 유리창에 그어진 투명한 궤적을 따라 일그러지고 도드라진 불빛들이 반짝였다. 그리고 검은 강물이 흘러갔다. '철커덩 철컹...' "어이, 고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였다. "..." 기억 속에서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었다. "야, 돌덩이. 뭐 안좋은 일 있었어?" 무시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세상에는 과도하게 넓은 오지랖에 집요할 정도의 친절을 지닌 사람도 있는 법이다. "후우, 그냥 그래." 난 한차례 숨을 뱉으며 짧게 대답했다. "하하하, 무슨 대답이 그래? 그렇게 무뚝뚝하니까 사람들이 고렘이니 돌덩이니 하고 부르는 거라고." 그는 크게 웃더니 손바닥으로 내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살짝 어깨를 틀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 별명을 처음 생각해낸 게 바로 너잖아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했다. "류하연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러나 한껏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등뒤에 독을 바른 보라색 단검을 숨기고 왕에게 다가서는, 이야기 속의 사악한 신하와 닮아 있었다. 질린다고 해야 할지 섬뜩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기분에 나는 입을 다문채 그저 고개만 저었다. "하긴 하연이를 노리는 녀석들이 많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길가의 돌처럼 가만히만 있어서는 아무 소용없다고." 그는 대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 정도의 어드바이스까지 그의 오지랖에 포함되는 걸까? 나는 웃고있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채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명이 없는 돌덩이라지만 구를 수는 있잖아. 산사태처럼 굴러보라고. 하하하." 그는 마치 웅변이라도 하듯 힘주어 말하더니 껄껄 웃었다. 그리고 손을 휘휘 저어보이더니 돌아서서 가버렸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 머릿속에는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흔들리는 손과 웃음소리가 맴돌다가, 가는 물줄기가 흐르는 검은 유리창 너머로 사라졌다. 도시의 불빛에 희미하게 반짝이던 검은 강물 역시 유리창에서 지워졌다. 강을 건넌 지하철이 다시 땅 밑으로 파고든 것이었다. 수천억년전의 땅 밑, 무저갱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거대한 열과 압력이 철과 온갖 금속과 여러 광물을 뒤섞고 응축시켜 하나의 거대한 바위를 만들어냈다. 지상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거대한 바위, 거대한 섬 혹은 작은 대륙과 비교할만한 거대한 바위였다. 바위는 생성과 동시에 그 부모인 열과 압력에 의해 또다시 수차례 갈라지고 녹아들었다. 그리고 어떤 거대한 힘이 온전한 형태로 남은 바위의 마지막 한 덩이를 높은 곳으로 밀어올렸다. 적어도 수억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는 어느 산을 두쪽으로 가르며 지표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세계. 바위는 산이 갈라진 계곡의 그늘에서 지상의 새로운 모습에 기뻐했고 또한 절망했다. 어째서 저 아름다운 풍경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인가. 계곡의 벼랑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볼때마다 바위는 안타까움과 분노와 절망이 깊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역은 홍대, 홍대입구 역입니다. 본 역은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내리실 때... 디스 스테이션 이즈 레드 유니버스티..." 녹음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나는 들고 있던 긴 검정 우산을 고쳐쥐고 문에서 한발 물러섰다. 얼굴 모를 여성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기계음으로 귓가를 맴돌다 희미해졌다. 검은 유리창의 한쪽 끝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곧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흰 유리창 위로 지하 역사의 풍경이 젖은 수채화처럼 흘러들었다. 열차의 흔들림과 작은 소음들이 잦아들면서 일그러진 풍경들은 점차 선명한 형상을 갖추었다. 늦은 시간의 한산한 모습이었다. 밝혀진 형광등의 수가 무색할 정도로 몇몇의 사람들만이 띄엄띄엄 서있는 모습이 서서히 미끄러지다 결국 멈췄다. 창 밖으로 보이는 계단 바로 옆의 플랫폼에는 조금 오래된 광고판과 텅빈 프라스틱 의자만 보일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순간 작은 소리와 함께 열차의 자동문이 열렸다. 플랫폼 옆 계단에서 누군가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군가의 말처럼 발 밑을 주의하며 열차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내리기 무섭게 흠뻑 젖은 한쌍의 어린 연인들이 계단을 달려내려오더니, 덤벼들듯 스쳐지나갔다. 굵은 물줄기와 꺅꺅거리는 소리의 여운이 그들이 지나온 길에 남아서 내 앞으로 이어졌다. 나는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올라갔다. 형광등의 창백한 불빛과 습하고 서늘한 적막이 계단에 가득했고 이따금 들고 있던 우산의 끝이 계단 턱에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계단을 다 올라와서는 개표기에 지갑을 가져다 대고 차가운 알루미늄 문을 밀었다. 텅 빈 역사를 지나 6번 출입구의 계단을 오르며 올려다 봤더니 계단 끝 너머로 검붉은 공기가 보였다. 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과 비오는 밤의 짙은 어둠 그리고 늦은 시간의 적막이 뒤섞인 모습이었다. 계단을 다 올라온 나는 들고 있던 검정 우산을 펼쳤다. 현란한 불빛과 그 불빛을 궤뚫는 빗줄기 속으로 한 마리 거대한 박쥐가 날아올랐다. 내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주말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편의점이었다.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인 올해초에 시작해서 한학기가 끝나고 여름이니, 반년 가까이 하고 있는 일이었다. 멀리 골목 밖의 대로를 지나가는 차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편의점으로 가는 길은 대체로 조용하여 굵은 빗소리와 이따금 아스팔트의 굴곡에 고인 빗물이 발밑에서 찰방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골목을 따라 양 옆으로 늘어선 여러 가게들 중에는 더러 불이 꺼지고 셔터를 내린 곳도 있었지만 아직 불이 밝혀진 곳도 제법 많았다. 그러나 날씨 때문인지 보통 때보다는 일찍 손님이 끊긴 모양이었다. '딸랑 딸랑!' 편의점의 커다란 유리문을 열자 문에 달려있던 작은 종이 신경질적으로 흔들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인수형 왔어요?" 카운터 안쪽에서 담배케이스에 등을 기대고 있던 젊은 사내가 몸을 바로 세우고는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응. 별 일 없지?" 난 어색하게나마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녀석의 이름도 기억 못했다.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의 몇분간 보는 사이인데 굳이 이름을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반년이나 지나고 보니 슬슬 이름을 물어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예. 재고정리랑 결산도 다 해놨으니까 그냥 아침까지 카운터만 보면 될 거에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안실에 들어가 편의점 로고가 크게 그려진 앞치마를 꺼내 걸쳤다. 보안실 한쪽의 CCTV화면에는 녀석이 카운터에서 앞치마를 벗고 가방을 챙기는 모습이 빛바랜 사진처럼 비췄다. "참, 인수형!" 내가 보안실에서 나오자 녀석은 자기의 앞치마를 갖다두려고 들어가다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일까. 내가 빤히 바라보자 말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찌 녀석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 요즘 이 근처 슈퍼나 편의점에 도둑이 든다더라고요." "으음..." 나는 입을 꾹 다물며 눈썹을 구겼다. 뉴스에 간혹 나오는 연쇄 강도 같은 건가. "아니, 뭐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고요. 행려인지 밀입국자인지가 먹을 걸 들고 달아난다나봐요. 저도 직접 본 건 아니고 아래쪽 까페 골목에 알바하는 애가 아까 그러더라고요. 뭐 이쪽 골목에는 안 온 모양이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뭐 강도 같은 게 아니라면 다행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럼 저는 가볼께요. 수고하시고요." 녀석은 유리문을 반쯤 열고 나가려다가 멈춰서서는 내게 고개를 꾸벅였다. 나는 입을 다문채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웃는 얼굴이 돌아서고 문 밖으로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편의점에 설치된 오디오를 틀었다. 'somes are in the shell. rocking me looking for the rock...' 날카로운 일렉기타와 묵직한 드럼비트에 섞여 외국인 보컬의 거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라디오인가? 왜 늦은 시간의 라디오에서는 외국곡을 많이 틀어주는 걸까? 나는 오디오의 볼륨을 줄이며 중얼거렸다. 담배케이스에 등을 기대고는 흘끔, 어깨 너머를 돌아봤더니 어느새 비가 그쳐있었다. 다소의 옅은 얼룩이 묻은 편의점의 유리창에는 백색 가로등에 반짝이는 검게 젖은 아스팔트와 건너편의 불꺼진 상가건물의 짙은 음영이 그려져 있었다. '딸랑딸랑!' 출입문의 종이 흔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보라색 반팔 셔츠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맨 중년 남자가 붉은 얼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인사는 한박자 늦게나왔다. 중년남자는 입구에서 편의점 안을 대충 훑어보더니 고개를 한차례 털고는 카운터쪽으로 다가왔다. 편의점-교대(암시) 손님A 손님B(칫솔 두 개와 스타킹, 말보로 레드를 사는 젊은 여인) 손님C(도둑) 추척(갈등) 포기(심경) 손님D 주인 전화(연장) 우중일출 비몽사몽(임계상황) 주인 비 그친 거리-역사-전철(유리 얼룩) 지리하던 장마는 한마리 표범만 남기고 갔다. 오늘 말간 햇살 아래 표범의 투명한 이빨이 내 목을 파고든다. 어느새 창너머, 아득한 햇살을 반사하며 명멸하던 강물은 그 흐름을 멎어있었다. 누가 바위에는 생명이 없다고 했던가. 도시, 소시민, 소심함, 무기질, 외강내유, 고렘, 야성,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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